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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사

퇴계 이황

by 까칠한 김양 2021. 5. 27.

퇴계 이황의 출생

퇴계의 성은 이, 이름은 황(李滉 : 1501~1570),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 도 옹(陶翁), 퇴도(退陶), 청량산인(淸凉山人) 등이며, 관향은 진보(眞寶)이다. 퇴계는 1501년(연산군 7년) 11월 25일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현 노송정 종택 태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진사 이식(李植)이고, 어머니는 의성 김 씨와 춘천 박 씨 두 분이다. 김 씨는 잠, 하, 신담 부인 등 2남 1녀를 두고 별세하였고, 재취로 들어온 박 씨가 서린(일찍 죽음), 의, 해, 증, 황 등 5형제를 낳았는데 퇴계는 그 막내이다. 퇴계의 부친은 서당을 지어 교육을 해 보려던 뜻을 펴지 못한 채, 퇴계가 태어난 지 7개월 만에 40세의 나이로 돌아가시고, 퇴계는 홀어머니 아래서 자라게 되었다. 부친이 돌아가시던 당시 맏형 한 분만 결혼하였을 뿐 다른 형제는 모두 어려서, 가족의 생계를 어머니가 홀로 농사와 누에치기로 이어가는 어려운 형편이었으나 어머니는 전처에서 난 자녀를 차별하지 않고 길렀다고 한다. 퇴계의 어머니는 과부의 자식은 몇 백배 더 조신해야 한다. 는 엄한 가법을 세워 자녀를 교육하였다. 퇴계는 6살 때 이웃에 사는 노인에게 천자문을 배우는 것으로 학문을 시작했으며, 12살 때 병으로 휴직하고 집에 와 있던 숙부에게 논어를 배웠다. 13세와 15세 때에는 형과 사촌 자형을 따라 청량산에 가서 함께 독서할 만큼 성장하였고, 16세 때에는 사촌 동생과 친구를 데리고 천등산 봉정사에 들어가 독학하기도 하였다. 17세 때 안동 부사로 재임 중이던 숙부가 별세하여 물을 곳도 없게 되어 스승 없이 대부분을 혼자 공부하였다. 그 때문에 퇴계는 글자 한 자도 놓치지 않고 자기 힘으로 연구하게 되었고, 비록 옛 성현의 글이라도 의심을 가지고 파고들어 재해석하는 학문 방법을 개척하게 되었다. 19세 때 성리대전의 첫 권 태극도설과 마지막 권 시·찬·함·명·부의 두 권을 구해 읽으니 점차 의미를 알 게 되었다. 퇴계 이황은 이때부터 성리학의 세계에 발을 들였다.

 

퇴계의 철학 사상

고봉 기대승(1527-1572)의 사단칠정 논쟁에서 잘 드러나 있다. 두 사람의 논쟁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퇴계가 서울에 살던 53세 때 이웃에 사는 추만 정지운이「천명도설」을 지어 보여주었는데, 퇴계는「천명 도설」의 내용 중 사단칠정에 관한 부분을 개정한 데서 비롯된다. 퇴계는 추만이 ‘사단은 이에서 발하고, 칠정은 기에서 발한다(사 단발 어리 칠정 발어기)’라는 문구를 고쳐서 ‘사단은 이의 발이고 칠정은 기의 발이다(사단리지발 칠정 기지 발)’라고 개정하였던 것이다. 개정된 이 구절을 본 고봉이 퇴계에게 질의를 함으로써, 이른바 사단칠정의 논변이 본격화되었던 것이다. 고봉의 질의에 퇴계는 자신의 이론을 다시 수정하여 ‘사단의 발은 순리이기 때문에 선하지 않음이 없고, 칠정의 발은 겸하기 때문에 선악이 있다(사 단지 발 순리 고무 불선 칠정지 발 겸 기고 유선악)’라고 제시하면서 고봉에게 의견을 묻는 편지를 보냈던 것이 8년에 걸친 퇴계와 고봉 사이에 벌어진 사칠 논쟁의 발단이 되었던 것이다. 퇴계는『주자 언해』에 자신의 처음 이론인 ‘사단은 이의 발이요, 칠정은 기의 발이다.’라는 말이 있음을 발견하고 자신의 주장이 틀림없다는 자신을 얻게 된다. 퇴계는 사단과 칠정이 다 정이지만 그 의미가 다르다고 주장한다. 그럼 어떤 점이 다를까? 퇴계는 사단은 ‘순선’이지만 칠정은 ‘선악 미정’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를 쉽게 설명하면 사단은 그 결과가 언제나 선하고 좋은 것이지만, 칠정은 결과가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는 양쪽의 면(겸 선악)을 다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선과 악이 아직 정해져 있지 않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서로 분별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기 역시 의미가 다르므로 결국 사단과 칠정을 각각 이와 기의 발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사단과 칠정은 원래 그 발하여 나오는 ‘유래(소종래)’가 다르다. 사단은 사덕 곧 인․의․예․지의 성으로 발한 것이고, 칠정은 다가와 감촉하여 마음속에서 움직이게 되는 것으로 말미암아 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단과 칠정의 분별은 성에 본연지성과 기질 지성의 구별이 있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고봉은 다음과 같은 입장에서 반대 의견을 펼쳐진다. 첫째는 세상 모든 것들 속에는 언제나 이와 기가 함께 들어 있기 때문에 마음의 움직임인 사단과 칠정도 퇴계의 주장처럼 하나는 이에서 나오고 하나는 기에서 나온다는 식으로 나눌 수 없다는 것이며, 둘째는 인간의 정은 하나이기 때문에 그 하나의 정은 물론 칠정이라는 것을 전제로 칠정 가운데 선한 부분만을 뽑아내면 그것이 사단이 된다는 것이다. 즉 사단을 칠정 속에 한 부분으로 보는 것이다. 따라서 사단칠정의 발출의 유래도 다르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퇴계 이황의 업적

퇴계(AD, 1501-1570)는 조선 이기 철학을 집대성하고 또한 조선의 유자형을 완성한 학자이다. 그는 성리학의 본질을 정밀하게 구명하여 조선 철학의 황금시기를 이루어 놓았다. 이때에 함께 활동한 학지로는 남명 조식, 하서 김인후, 일재 이항, 소재 노수신, 우계 성혼 , 율곡 이이 등과 불교계에서는 보우와 서산 등의 사상가가 배출하였으며 특히 율곡은 재간과 경륜적인 식견이 뛰어났었다. 진성 이식의 오남으로 연산군 7년에 안동 예안 온계에서 출생하였으며 2세에 숙부인 송재에게 논어를 배웠고 농암 이현보에게 청익 하고 19세에 성리대전을 보다가 학문의 단서를 깨친 그 술회에 「홀로 숲 속 집의 만권서를 사랑하여 일반심사 십 년여이라 그로부터 학의 단서를 이해한 것 같으니 도시 내 마음을 잡이 태허를 보았노라」하여 우주 본질과 그 첫머리를 아는 것 같았다. 또 일찍이 주역을 정 사독 구하여 침식을 잊어 몸을 상하게 하였으며 27세에 급제하고 태학에 유학할 때 하서와 도의 교를 맺었다. 중종 말에 문정왕후와 인종 사이의 험악함을 보고 귀향하는 하서를 부러워하다가 사림에 대한 탄압을 보고 드디어 귀향하였다. 그 후 다시 단양과 풍기군수를 지내고 백운동서원을 재건하여 사림의 수학을 고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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