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 역사

고려문화재

by 까칠한 김양 2021. 5. 27.

고려문화재

고려는 태조 이래 불교를 국교로 숭상함으로써 정치 ·사회의 지도이념이 되었다. 불교의 경향을 보면 사찰에는 사 원 전(寺院田) 외에 왕실 귀족들의 희사로 토지와 노비가 증가되어 대장원(大莊園)을 소유하였고, 광종 때는 승과 제도(僧科制度)를 마련하여 승과에 합격하면 교 ·선종을 막론하고 대선(大選)이란 첫 단계의 법계(法階)를 주었으며, 또 왕사(王師) ·국사(國師) 제도로 승려들을 우대하였다. 문종 때 승려 개인에게도 별 사전(別賜田)을 지급하였으며, 사원에는 면세 ·면역의 특전까지 부여하는 등 보호책이 강구되었기 때문에 많은 승려들이 배출되었다. 불교의 성격은 호국적 ·현세 구 복적(現世求福的) ·귀족적 불교로 보호육성되었다. 따라서 역대 군왕들은 국가의 대업이나 안태(安泰)를 위하여 대사찰의 건립, 연등회 행사, 대장경 조판 등 국가적 불교 사업을 추진하였다. 고려 초기 불교의 종파는 5교(五敎 : 敎宗)와 9 산(九山 : 禪宗)이 양립, 존재하면서 대립 침체된 상태에 있었다. 당시의 고승으로는 균여 대사(均如大師) ·혜거(惠居) ·탄문(坦文) ·제관(諦觀) ·의통(義通)이 있고 그들의 활약이 컸다. 이때 제관은 오월(吳越)에 건너가 《천태 사교의(天台四敎義)》를 저술하여 천태종(天台宗)의 기본교리를 정리하였고, 의통은 오월에 건너가 중국 천태종의 13대 교조(敎祖)가 되어 교세를 떨쳤다. 문종의 아들인 의천(義天)은 송나라에서 화엄 교리와 천태 교리를 배우고 돌아와 교 ·선종의 대립으로 침체된 불교를 통합 발전시킬 의도에서 교선 일치(敎禪一致)를 주장하고, 숙종 때 천태종을 창설하여 교관겸수(敎觀兼修)를 주장하였다. 천태종은 무신의 난 이전까지 왕실과 귀족의 보호로 육성되었으나, 그 후 교단 자체 내의 변동으로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은 조계종(曹溪宗)을 개창하여 고려의 불교는 양종으로 분리되었다. 조계종은 인간의 마음이 곧 부처의 마음을 깨닫는 것이며, 좌선(坐禪)을 주로 하여 마음에 경전을 깨닫도록 하는 돈오점수(頓悟漸修)의 수도 방법으로 수행을 강조하였다. 조계종이 교리상 발전을 보자 최 씨 정권은 왕족 문신들과 연결, 현실참여적인 천태종 세력을 억압하기 위하여 정책적으로 조계종을 후원하여 조계종을 무신정권의 사상적 근거로 삼았다. 그러나 몽골 간섭기에 미신적인 면이 강한 라마 불교가 들어오면서 폐해가 많아져 불교행사, 사탑의 건립 등으로 재정의 낭비가 컸다. 또한 승려들의 토지겸병과 고리대금업 ·상업행위 ·군역 도피의 소굴 등으로 그 부패가 심하여져 고려 말 신흥 사대부층의 성리학자들로부터 배척을 받았다. 정도전은 그의 《불씨잡변(佛氏雜辨)》에서 불교를 멸륜해국(滅倫害國)의 도(道)라고 공박하였다. 후기의 고승으로 보우(普愚)는 임제종(臨濟宗)을 전래하여 조선 선종의 주류가 되었고, 혜근(慧勤)은 인도의 지공(指空)에게 구법, 조계종을 발전시켰으며, 자초(自超)는 조선 태조의 왕사(王師)로 활약하였다. 이와 같은 교세의 변화는 원효(元曉)의 사상적 기반이 있었으므로 의천이 천태종을 개창할 수 있었고, 지눌도 의천의 사상적 통일 경험과 전통이 있었기 때문에 조계종의 사상체계가 수립된 것이다. 조계종도 고려 후기 사회의 모순을 시정하는 원동력은 못되었으나 교리상의 발전으로 불교계에 신풍을 불러일으켰다.

 

무량수전

무량수전은 부석사의 주불전으로 아미타여래를 모신 전각이다. 아미타여래는 끝없는 지혜와 무한한 생명을 지녔으므로 ‘무량수불’로도 불리는데 ‘무량수’라는 말은 이를 의미하는 것이다. 무량수전은 14세기에 중건된 것으로 추정되며, 봉정사 극락전의 건립 연대가 13세기 초로 확인되기 전까지는 ‘한국 최고의 목조 건축으로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건물 가운데 두 번째로 오래된 것이다. 그러나 이 건물은 가장 오래되었다는 사실만으로 평가를 받는 것은 아니다. 시대를 초월하여 전해주는 건축적 교훈을 간직하고 있기에 그동안 무수히 많은 연구와 조사가 이루어져 왔다. 완벽한 비례와 조화, 기능과 구조의 아름다움 등 서구의 분류로 한국 건축 무량수전의 아름다움은 르네상스 적이다.

 

부석사

부석사(浮石寺)는 오늘날까지 규모를 잃지 않고 보존해 온 천년 대찰 중에서 그 창건 유래와 역대 고승의 활약이 비교적 확실한 보기 드문 절이다. 부석사의 가람을 “이는 귀신(鬼神)의 역사(役事)요, 하늘의 솜씨라 할 만큼 일대 장관을 이루고 있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사찰을 보려면 먼저 건물들이 놓인 터와 그 주변의 산세를 살펴보는 게 순서이다. 놓일 자리에 따라 건물의 조형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사찰은 대부분 산지나 구릉지에 위치하며, 길게 늘어진 공간 구조를 가지고 있다. 부석사는 국이 좁고 가파른 땅에서 높은 석축(石築:돌로 쌓아 만든 옹벽의 한 가지)과 건물을 잘 이용하여 짜임새 있게 공간 배치를 하고 있다. 부석사가 위치한 곳은 봉황산 중턱이다. 일명 옥산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고려 말 원의 침입에 의하여 공민왕이 안동으로 피난했을 당시 왕이 부석사가 있는 봉황산을 올랐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동쪽으로는 문수산, 남쪽으로는 학가산의 맥이 휘어들고 서쪽으로는 소백산맥이 휘어 돌아 거대한 울타리를 이루고 있는 가운데 위치하고 크고 작은 봉우리들이 봉황산을 향하여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형상이다. 풍수지리 사상으로도 뛰어난 길지에 속하며 안양루 쪽에서 멀리 도솔봉 쪽을 바라보면 펼쳐 있는 산맥의 연봉들이 장관을 이룬다.

 

'한국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선덕여왕  (0) 2021.06.01
고려청자  (0) 2021.06.01
다산 정약용  (0) 2021.05.27
퇴계 이황  (0) 2021.05.27
신사임당  (0) 2021.05.26

댓글